대중문화이론 개조를 위한 프로젝트

2016년 5월 24일culturalaction

탈대중, 소중, 오타쿠, 동물화, ‘신’문화산업, 플랫폼,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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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구소에서 운영위원들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하고 있다. 제목은 소중 시대. 대강의 줄기는 이렇다. 이제 대중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소중들의 시대다.

이 말을 처음 접했던 건 어느 음악평론가의 글에서였다. 소녀시대의 <Gee>(2009) 이후로 국민가요라 일컬을 만한 압도적 음악이 나오지 않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대중문화에서 대중을 떼내고 소중의 도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취지의 글이었다1). 대중문화라고 에둘러 말하긴 하지만 오늘날 대중 모두가 선호하고 지지하는 대중문화가 과연 어디 있을까. 따지고 보면, 대중이란 말 자체가 원래 실체가 없거나 모호한 말이긴 하다.

1) <강남스타일>(2012) 같은 곡이 있긴 했지만 음악과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다기보단 인기 자체로 인기를 끈 경우니 예외로 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자어권에서 번역한 ‘대중적’(popular)이란 말과 그 말의 바탕이 되는 ‘대중’(the masses)이란 말이 점차 분리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대중적이라 했을 때 이 말은 (영어 그 자체가 지시하는 것처럼) 통속적이고 범속적이며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굳이 대중이라는 모호한 존재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식이다. 오타쿠가 대중은 아니지만 오타쿠 문화는 충분히 대중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클래식 매니아들도 대중은 아니지만 클래식 문화는 충분히 대중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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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 관한 통념을 바꿀 때가 됐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바보상자로 여기고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을 딴따라라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긴 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회 풍속이니 진정성 같은 것을 들먹이며 훈장질하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바꿀 때라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안타깝지만 그들은 우리의 관심 대상이 못 된다. 우리의 통념 개조 프로젝트의 대상은 1990년대쯤 나타나서 오늘날 쇠퇴기를 구가하고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 통념에 해당한다.

요약적으로 말하자면, 영국 현대문화연구소에서 비롯됐던 문화연구의 이론적 프레임을 초극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과 순응·저항하는 사람. 한동안 이런 프레임이 유용할 때가 있긴 했다. 대중문화 소비를 통해 생산자의 의도와 지배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정신승리’ 도식을 제시해줬기 때문이다.

정신승리란 말이 허위의식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지배자는 꿈쩍도 않는데 피지배자들끼리 또는 시청자·관객들끼리 승리했다고 자축하는 건 다소 난감한 일이다. 미디어 문화연구, 특히 대중문화연구가 정치적 무기력증에 빠진 건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처럼 결론은 두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즐거우면 장땡이라고 ‘대중주의적 자위’에 빠지거나,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기보다는 묘사(description)에 치중하면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충실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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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가 국가권력뿐 아니라 시장권력에 대해서도 비판해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이론적 틀에선 불가능한 것 같다. 재현과 정체성 등을 둘러싼 문화 전쟁이 시장권력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권력과 싸우려면 결국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현실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포스트모던 국면과 더불어) 저항적이고 문화민주적인 경험을 자극했던 코드들이 대중문화의 지배적 코드들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에 있다. 예술영화에서나 있었을 법한 카메라 프레임 바깥 또는 스튜디오 바깥을 보는 경험은 이제는 TV 시청에서도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적잖은 좌파 이론가들이 ‘열린 예술작품’ 운운하면서 수용자들의 참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무한도전>이나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프로그램들은 아예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긴다.

이제 주사기 모형2)식의 대중문화론 따위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고, 심지어는 지배와 저항이라는 전선조차 모호한 것이 되고 있다. 저항문화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상업적 지배문화가 되어 있고, 소비자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제작과 유통 체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요는 이렇다. 이제 와서 대중문화를 통해 민주적 경험을 한다는 것 따위는 역사적으로 점점 의미 없는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2) 마치 주사약을 맞듯 시청자들이 주입 당하기만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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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대중 형태의 부재 혹은 해체는 의미심장한 사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소중이니 분중이니 하는 마케팅 용어가 나오고 토플러가 탈대중화를 예견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말들은 그저 이데올로기적 언술로 들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오늘날엔 현실이 되어 있다. 참이었다고 해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변화들로 인해 어떤 효과들이 생기는가에 대해 물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각자가 원하는 취향에 따라 문화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고, 또한 그런 한에서 문화가 순환되는 장(場)에서 능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이것이 소중, 분중, 탈대중화 설명의 기본 요점이다. 원래 이데올로기는 말만 들었을 땐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법이다. 그동안 꿈꿨던 문화민주주의의 세상 아닌가3). 어쩌면 이 글을 발행하는 문화연대의 조직 비전과도 부합하는 말들일지도 모르겠다.

3) 이런 약속이 계급차별적으로 실현되는 문제 등은 일단 논외로 하자. 여기선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더불어 맺어졌던 약속이 우리들의 평균적인 일상 깊이 침투해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니까.

취향을 중심으로 하든 처지를 중심으로 하든 대중의 이합집산 현상은 새롭다면 새롭지만 낡다면 낡은 현상이기도 하다. 대중적이었던 문화 형식의 성숙이 극에 달해 더 이상 새로운 스타일적 혁신을 할 수 없을 때 스스로를 정전화하고 수용자들로 하여금 반복 감상하도록 이끌었던 현상은 사실 많았다. 오페라가 그렇고, 클래식이 그렇고, 재즈가 그렇고, … 이런 규칙성에 의하면 앞으론 ○○○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반복되기만 하는 법은 없다. 우리는 지난 시기의 대중문화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그로써 등장하는 ‘소중’들의 주체성에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를 살피고자 한다. 포스트모던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것들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독특한 국면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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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독점이란 말이 점점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것도 문화산업에서. 1980~90년대 문화산업의 독점화 경향이 예의 수직계열화 양상으로 나타났다면, 오늘날 신흥하는 문화산업의 독점화 경향은 (독점이란 말 자체를 대체하고 있는) 플랫폼화 양상을 띤다. 일각에서는 정보자본주의 또는 인지자본주의 국면으로 조만간 자본의 한계가 드러날 것처럼 설파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free labor 현상이 전면화되는 현실에도 더 주목한다. 그것은 양가적이어서 ‘자유노동’의 형태를 띠지만 스스로를 탈숙련화하고 노쇠화시킬 정도로 착취적인 ‘무임노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4). 그렇다면 미디어 컨버전스 따위의 문화적 가상을 통해 플랫폼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동학을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4) 그런 점에서 ‘열정 페이’니, ‘열정 착취’니 하는 표현들은 비록 20대가 최전선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만의 전유어로 치부할 일은 아닌 셈이다.

우리는 두 번째의 아도르노 국면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신’문화산업이라고 해야 할까. 광고 분야에서 ‘소중’과 ‘분중’ 따위의 신조어들 역시 예사롭지 않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문화산업 시대 수용자들의 주체 형태를 연상하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참조점이자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입구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환경이 개인들의 선호와 취향에 따라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건 대중들에 대한 인구학적 서술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을 평균적인 존재로 취급한다는 건 그 자체로 결례일뿐더러 이론적으로도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플랫폼과 소중이 조우하는 지점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얼마간 신화적이었던 교조적 아이디어를 정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배적인 것은 그것이 지배계급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게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보편성 때문에 지배적이게 된다. 한국 문화이론계에서 상식처럼 통용됐던 지배와 저항의 이항대립은 점점 무의미한 것이 되고 있다. 오늘날 문화산업은 피지배자들의 능동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라는 문화적 가상을 조건으로 해서만 작동한다. 이 지점이 바로 문화이론, 적어도 대중문화에 관한 이론이 시장권력에 대한 비판 기획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역사적 배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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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문화연구가 아니라 문화비판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비판은 우리가 알던 비판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알기로 지배의 상대어가 순응 내지 저항이란 도식은 순진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저항 대신에 참여나 활동 또는 임파워먼트 같이 연성화된 말을 갖다붙여도 마찬가지다. 지배는 우리가 알던 지배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참여와 저항 따위의 외부적인 것들을 내부화한, 프라임(‘) 붙은 지배, 즉 변증법적으로 진화한 지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구조에 대한 비판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행위에 상대적인 언어로서 구조도 아니고, 아비투스니 구조화니 중범위적 용어들과 함께 배열시킬 수 있는 구조도 아닌, ‘구조 이상의 구조’로서 제 스스로 재구조화의 동학을 내장한 ‘메타구조’에 관한 문제설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더불어 새로운 비판 프로젝트에는 주체성에 대한 비판 역시 포함된다. 어느 평론가가 말했던 바와 같이, 이제는 대중과 싸우는 일이 진보다. 이 말은 이중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이 바보여서 그들과 싸워 계몽시켜야 한다는 고답적인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에서 살면서 어느 나라보다 고학력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중을 생각해보자. 문제는 전혀 다르지 않겠나. 요컨대, 표적도 좌표도, 그 모든 대의가 사라진 시대에 (코제브식으로) 동물화되는 주체성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정치라는 것은 점차적으로 소실되거나 (전혀 이상한 방식으로) 변전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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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도 있다. 연구 여건이나 역량 문제도 따져봐야 하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문제니 말이다. 하지만 문화연구가 정치적 무기력에 빠져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 현실을 방기하거나, 아니면 ‘오타쿠 좋아요’ 하면서 실실거릴 수도 없지 않겠나. … 이 정도면 약간이나마 문화이론 개조 작업의 명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김성윤 _문화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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