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어른

2016년 6월 28일culturalaction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준비모임에 나갔다. 초기자금 3천만 원을 개인 활동가가 후원하면서 “꿀잠”은 본격적으로 비정규노동자의 집을 만들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 다녀야했다. 개개인이 아는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지인들을 찾아다녔고, 노조조합원, 단체 활동가, 종교단체 어르신들까지 십시일반 재정을 후원하기도 하고 지인을 소개하기도 했다. 웹을 통해 펀딩도 했고, 후원요청 웹자보도 돌렸고, SNS에 페이지도 만들고 집 만들기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났고 모금된 돈은 3억 원이 조금 넘는다.

3억 원은 사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돈이다. 이 돈은 1,000원에서 1,000만 원까지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금액으로 후원해준 돈이다. 하지만 아직도 목마른 금액이다. 그건, 서울에 집을 만들 수밖에 없는 꿀잠의 처지 때문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비정규노동자는 한 달에 수 없이 많은 날을 서울로 상경하여 투쟁에 연대하기도 하고, 투쟁을 만들기도 한다. 자본과의 투쟁, 정부와의 투쟁, 거리에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투쟁은 상경과 함께 노숙은 기본이며 씻을 공간하나 화장실 한 번 편하게 가기 힘들다.

“꿀잠”은 서울에 집을 알아보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집값이 어마어마~~~하다. 10억 원은 있어야 한다. 10억…….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돈이다. 그래도 힘을 모아보자. 처음 출발부터 지역 비정규노동자의 의견을 충분하게 수렴한 터라 그 필요성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기에 모두가 발 벗고 나 설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꿀잠 준비모임에 나간 나에게 요청이 들어왔다. 기금마련을 위한 기금전시회를 기획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몇 주를 흘려보냈다.

기금마련전이라… 주변에 단체들이나 재단이 처음 만들어 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 번 쯤은 기획해봤던 그런 기획전은 싫었다. 내가 속한 문화연대도 재정마련을 위한 기금마련 전을 한 적이 있었다. 작품을 후원받는 것도 그리고 후원받은 작품을 판매하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꿀잠”준비를 하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대부분이 현장 활동가다. 대작을 후원 받는다 해도 우리 주변에는 그 작품을 사 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더 고민이 되는 시간이었다.

올 초 나는 강정마을에 자주 다녔다. 해군기지가 준공식을 하고, 주민들과 강정지킴이들은 매일을 힘겹게 지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했고 그 결과 주민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 마을에 평화의 상징물을 만드는 일등 뭐든 해보려고 강정을 드나들었다. 그 때마다 문정현 신부는 조용히 해군기지 정문 앞 미사 천막에서 서각을 파고 계셨다.

2009년부터 시작한 신부님의 서각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지기 시작했다. 용산참사의 아픔도 있고, 세월호 참사의 기억도 있고,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밀양을 응원하는 글귀도 있다. 강정마을에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바라는 기도 글이 해군기지 공사장 앞 도로변에 빼곡하게 놓여있다. 그 글귀는 구호가 되기도 하고, 기도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가사가 되기도 했다. 신부님의 서각들을 볼 때 마다 멋진 전시공간에서 사람들에게 소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지난 몇 년 전 강정포구 아래로 떨어져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신부님은 요즘 거리에서 잘 쓰러지신다. 정신을 잃고 일어나서는 왜 어떻게 쓰러졌는지 기억을 못하신다고도 한다. 함께하는 이들은 매일이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거리의 신부 문정현은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도 없다. 올 해는 문정현 신부께서 사제수품을 받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교회에서 축하식을 갖기는 했지만 거리의 신부로서 활동가들과 함께 축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 기획 안에 신부님의 서각전도 염두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렇게 생각이 많던 날들 속에서 세상은 하루도 조용하지 않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참담하게 죽어갔고, 민주노총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국가의 사과와 대책을 말하라 외쳤다. 외면하던 국가는 거리로 나와 진실을 외쳤다는 이유로 물대포와 최류액에 범벅이 되었고 결국 백남기 농민은 의식불명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뿐인가 노동자들의 죽음이 줄을 잇고 있지만 분향소조차 설치할 수 없게 국가는 경찰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 모든 자리에 꼭 함께하고 계신 분이 있다. 백기완 선생이시다.

용산참사 7주기 추모문화제가 있던 날 백기완 선생은 야윈 몸의 노구를 한겨울 추운바람에 맏기고 유가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신다. 몸이 살짝 떨리는 모습이 보인다. 먼저 들어가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유가족의 이야기가 철거민의 이야기가 끝나고 일어서겠다고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 봄 예술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며 특강을 하셨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 이 말은 침묵까지 삼키는 썩은 늪이라 하더라도 솔방울 하나로 ‘퐁당’하고 그 미적 질곡을 깨트리는 것이 예술의 힘이다. 그 노래는 질곡에 빠진 오늘의 모든 변혁, 모든 진보의 거짓과 부패를 깨트리는 예술이 된다.” 가슴에 와 닿으며 뭔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문화예술인으로 우린 무엇을 하고 있나. 힘내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또 “남기려 살지 말고, 그냥 사는 것이 남기는 것이 되게 하라”고도 하셨다. 예술은 남기는 것이 아니다. 삶의 매 순간이 예술의 힘으로 남기를 소원할 뿐이다. 내년은 통일문제연구소 창립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다.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던 터에 “꿀잠”이 나에게 숙제로 던진 기획전은 앞 서 고민했던 것들을 한 번에 만들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두 어른> 전시는 두 어른에, 두 어른에 의한 전시지만 이 전시는 <비정규노동자>를 위한 전시다. 문정현 신부의 서각은 거리의 신부가 남긴 현실이며 백기완 선생의 붓글씨는 모진고문과 탄압이 있던 정치적 현실을 살아오면서 가슴으로 빚어낸 말들이다. 붓글씨를 부탁드렸고 승낙받기까지 여러 날이 필요했다. 백기완 선생은 “글씨는 쓰는 사람이 쓰는 거야 멋쩍어서 어려웠어. 좋은 일을 한다니까 했는데 내놔도 되는 붓질인지 걱정이 돼.”라고 말씀하시며 36점의 글을 주셨다. 문정현 신부는 “다 가져가. 다 가져가서 좋은데 써.” 라며 70여점의 서각을 내어주셨다. 그저 송구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최선을 다해 전시를 준비하고 있고, 최선을 다해 두 분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저 높은 관공서 건물에도, 노동자들의 공간인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사무실에도, 성당, 교회, 법당에도, 서울시청에서 제주시청까지 모든 관청 로비에도, 국회의원들의 사무실마다 두 어른의 작품이 걸리고 그 작품 속에 담긴 뜻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선 청와대 현판으로 걸고 싶다. 그렇게 세상 곳곳에 두 어른의 이야기가, 두 어른의 글귀가 알려지고 두 어른이 함께 만드는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이 멋지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2016년 7월 5일. <두 어른>전시가 문을 여는 날이다. 청와대를 향해 스피커를 울리면 아마도 그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작은 공간이지만 멋스러운 공간 <류가헌갤러리>. 모두가 하나 된 마음으로 <두 어른>을 응원해주었으면 좋겠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두 어른> 전.

전시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콩당 거리고 분주하다. 모든 작품이 다~~~ 팔려서 다시 <두 어른>께 또 써주세요. 또 만들어 주세요라며 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은 더 괴롭혀드리고, 힘들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을 아마도 <두 어른>은 알아주실 것 같다.

  • 신유아 _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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