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동네의 기억

2016년 5월 18일culturalaction

지난 주에 소개된 글, ‘우리 아파트를 소개합니다’ 2탄.
사진가 김계연님의 기고글과 사진입니다.

40년 된 동네가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에겐 득이 되고 기대에 찬 풍경일 테지만 여기 주공단지에서만 세 집을 거쳐가며 학창시절 10년 주부 10년, 자그마치 이곳에서 20년을 살아낸 나 같은 이에겐 스산하고 잔인한 시간이다.

이주가 결정된 단지의 거주민들 상인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남은 텅 빈 공간을 마주하게 되니 애써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장소에 대한 지난 기억들이 끊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아마도 앞으로 다시는 떠올리지 못하게 될 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사람들 그리고 공간들을 하나씩 돌이켜본다. 2단지 종합상가에 자리했던, 헌 여름 이불을 새 것처럼 고쳐주신 수선집 아주머니의 솜씨에 감탄했었고 상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떡을 파시던 할머니의 콩고물 쑥떡은 참 맛있었다. 발목이 삐어 침을 맞으러 다녔던 한의원에서 늘 풍기던 한약냄새는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고, 아이가 태어나고 첫 예방접종을 맞았던 소아과는 처음이라는 의미가 깊었다. 늘 밝은 미소를 띄고 인사해주시던 온화한 약국 아주머니,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다녔고 지금의 아이가 다니던 학교 옆 작고 오래된 피노키오 문방구, 아이와 해마다 잔뜩 모은 동전을 한아름 들고가 저축했던 은행, 더 유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네에 대한 곱디 고운 추억은 끝도 없다. 물론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것 들은 추억이라는 망에 다 걸러지게 마련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곳에서 꽃나무가 화사한 봄을 지내고 울창한 잎사귀가 푸르디 푸른 무더운 여름을 지내고 단풍은행이 남부럽지 않은 가을을 보냈다. 엄동설한은 또 몇 해나 겪었을까.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이 곳은 첫 무대였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이 동네에서의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아이엄마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발을 들여놓은 사진작업. 작업의 주제로 나 자신, 주부의 삶을 돌아보다가 자연스레 우리 동네만의 특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밖에서 나부끼는 각양각색의 빨래들. 요즘 보통의 규제 많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접하기 힘든 생경한 풍경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의아했다. 내 삶의 속살 같은 빨래를 타인의 시선 안에 둔다는 것이 참 과감해 보이기도 했고. 그렇게 누군가의 빨래를 하나씩 수집하듯 사진기에 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널린 풍경>이라는 개인전을 하게 되고 사진집을 만들게 되었다. 주공아파트 빨래시리즈는 빨래를 마친 옷가지들에 대한 애정 어린 주부다운 나의 시선, 이질적인 풍경에 대한 호기심, 아이들 대신 빨래가 자리하고 있는 낡은 놀이터의 황량함, 빨래가 널린 아파트의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를 짚어 나간다. 시선이 타인의 빨래에 하나하나 닿아 갈수록 그것은 더 이상 그저 지나쳐가는 빨래가 아닌 타인의 삶이 빚어낸 하나의 소박하고도 극적인 작품이 된다. 아파트 사이사이를 누비며 빨래를 담아가는 과정에서 강렬한 햇살과 살랑 바람에 실려 오는 달콤한 세탁세제의 향기를 맡는 순간은 나에게 삶에 대한 치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 살가운 동네에 차가운 펜스가 쳐지고 통행금지 딱지가 붙었다. 반세기 가까이 수많은 생활을 거쳐간 공간들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새로운 아파트를 위해 땅이 깊숙이 파이고 있다. 동네를 집어 삼킬 듯한 거대한 레미콘이 줄지어 다닌다. 어릴 적 뛰놀던 놀이터는 진작 철거 됐고 동네의 좋은 공기를 묵묵히 지켜주던 고마운 나무들도 조용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이주가 새로 시작된 단지의 저녁 불빛 켜진 창의 수가 줄어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서늘하다. 아이의 반 친구들은 하나 둘 전학 가고 새로운 사귄 마음 맞는 친구는 아쉽게도 이사를 앞두고 있다. 가까운 지인이 살고 내가 살았던 옆 단지들의 이주에 이렇게나 뒤숭숭한데 우리 차례가 돌아오면 그 마음은 또 어떨는지. 오늘은 우리 단지의 조합원 관리처분총회를 한다며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주공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아득히 묻혀버릴 서울 동쪽 끝자락 동네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하릴없이 지켜보고 있다. 다행히도 동네가 찬란히 빛나던 순간을 작게나마 사진으로 남겼다는 것에 큰 위안을 삼으며.

  • 김계연 _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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