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0] 야단법석 꿈의 공장 -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의 연대기(1)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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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아 / 문화연대   2007년 당시 콜트악기와 콜텍은 전 세계 기타 시장의 점유율이 30%에 이를 정도로 ‘잘나가는’ 회사였다. 회사의 재무상태도 안정적이었고, 과거 10년 동안 꾸준히 흑자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갑자기 국내 공장을 폐업하고 노동자 정리해고를 단행한 이유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이전했기 때문이다. 콜트.콜텍은 세계적인 기타브랜드 펜더, 알바레즈 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다량의 기타를 납품하고 있었다. 박영호 사장은 30년 동안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쥐어짜 자산규모 1000억 원대에 이른다. 한국 부자순위 140위가 되었다. 이것도 모자라 박 사장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1993년 인도네시아 공장과 1999년 중국 공장까지 설립하고는 천천히 국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하고, 7월에는 계룡시에 있는 콜텍 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 했다. 2008년 8월에는 인천 콜트악기마저 폐업했다. 생산 물량을 인도네시아와 중국 공장 등 해외 공장으로 빼돌리고, 서류상 경영위기를 만들어 정리해고와 폐업의 명분을 삼았다. 문화연대는 네트워크 안의 예술가들에게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연대하자고 호소했다. 연대는 힘을 받기 시작했고 사진가, 뮤지션, 다큐감독, 시각미술인, 생활창작자들로 점점 확산되어갔다. 연대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은 투쟁의 소재가 예술가들에게 친근한 기타여서 인지, 투쟁 당사자의 절실함이었는지, 누구의 투쟁이 아닌 자신의 투쟁이라 여겨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상의 투쟁이 혼자가 아닌 우리로 이어졌고, 문화예술인들 스스로 콜트.콜텍 투쟁 속에서 작은 투쟁을 만들어 갔다. 다른 투쟁현장과 달리 콜트.콜텍 농성장은 늘 무언가를 만들고 뚝딱거린다. 농성장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집을 만들었다. 누구나 편하게 드나들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작은 투쟁을 실천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 공유의 공간이었다.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 출발한 연대는 스스로의 노동자성을 인식하고 자신만의 작은 투쟁을 만들어 갔다. 2012년 콜트.콜텍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가(파견미술팀)와 활동가들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집’이라는 이름을 짓고 부평공장에 진을 치고 살았다. 연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빈 공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도 하고 함께 하자고 노래도 했지만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평공장으로의 연대는 발걸음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꿈의 공장에서 다양한 문화행동을 매일 새로이 만들고 연대를 가꾸어 갔다. 헌 티셔츠에 선전문구 적기,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콜트.콜텍 다큐 상영회, 노래 배우기, 문선 배우기, 이동수 만화가에게 배우는 캐리커처 그리고 서로의 얼굴 그려주기, 판화 만들기, 걸개그림 그리기, 깃발 만들기, 크리스마스카드 만들기, 농성장 성탄분위기로 꾸미기, 보드게임도 하고, 운동회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고, 설날에는 윷놀이도 하고 떡 국도 나눠 먹고, 연도 만들어 날려보고, 민요도 배워보고, 목공 선생님과 함께 농성에 필요한 의자 등 다양한 목가구 제작도 한다. 겨울이면 월동준비로 공장 안팎을 꾸미기도 하고 여름이면 텃밭을 만들고 거기에서 수확한 야채들로 음식도 만들어 먹었다. 희망을 나누는 사이 부평 콜트공장은 점점 꿈의 공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매주 화요일 <야단법석>이라는 이름으로 홍보물을 만들고,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연대를 호소했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은 목수가 되기도 하고, 가수가 되기도 하고, 다소곳이 바느질을 하고,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기도 하고, 화가가 되어 붓을 잡기도 했다. 스스로 무언가가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던 기타노동자들은 명가수 이인근을 만들었고, 법률 전문가 방종운을 만들었고, 명 요리사 임재춘을 만들었고, 뚝딱이 목수 김경봉을 만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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