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담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용철 | 문화연대 집행위원
다음 시대로 넘어온 스포츠, 과거로 돌아가려는 대한민국 체육계
국제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선수가 메달을 따면 가슴이 웅장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올라가면 머리에 붕대를 묶고 투혼을 발휘한 선수가 복받치는 듯 눈물을 쏟고 온 국민이 함께 훌쩍였다. 오랫동안 스포츠는 대한민국을 세상에 알릴 유일한 기회였다. 멀게는 손기정, 양정모, 차범근으로부터 가까이는 박세리, 박찬호, 박지성, 박태환, 김연아, 손흥민까지.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던 그들은 곧 국가를 상징했다. 어쩔 수 없이 스포츠는 무거웠고 비장했다. 한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경기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젠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일본대표팀에 대패한 한국 대표팀에게도 그런 악담을 퍼붓진 않는다. 비록 한국야구의 후진성을 비아냥거리고 KBO의 책임을 탓할지언정 일본에 졌다고 세상이 무너진 양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오타니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강백호의 경박함에 잠시 부끄러워도 그들의 뛰어남이나 우리의 부족함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미미하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내가 어떤 변화를 감지했던 건 소치올림픽 때 김연아의 인터뷰에서다. 완벽한 경기를 하고도 미심쩍은 판정으로 금메달을 놓친 김연아를 대신해 대한의 열혈 팬들이 밤새 조직위에 항의 청원을 넣었다. 그 청원의 수가 짧은 시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자 외신에서 한국인 집단행동의 병리적 원인을 물을 정도였다. 당시 흥분했던 국민과는 달리 당사자인 김연아 선수는 매우 의연한 자세로 은메달에 만족하며 실수 없이 마지막 경기를 마쳐 후련하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남겼다.
대중이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광란의 국가주의에 머물고 있을 때 한 선수는 이미 다음 시대의 스포츠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지 보여주고 있었다. 비슷한 상황이 평창에서도 벌어졌다. 보니 블레어 이후 첫 올림픽 3연패의 기회라는 언론의 의미 부여로 이상화의 500미터 금메달에 대한 기대(라고 쓰고 부담이라 읽는다)가 컸다. 결승에서 만난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경쟁해온 라이벌이자 친구로 이상화가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할 때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롤모델로 삼아 스케이트를 탔다. 2018년 평창에선 고다이라가 이상화를 제치고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을 때 경기를 마치고 엉엉 우는 이상화를 안고 고다이라는 ‘너는 나의 영원한 챔피언’이란 말을 남겼다. 스포츠에는 우리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온 메달보다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다음 시대로 성큼 건너갔다.
죽기 살기로 운동하는 시절엔 온갖 반인권적 방법이 넘쳐났다. 욕하고 때리는 건 기본이고 경기력을 올릴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의 훈련 방식을 전문가들은 ‘JJ(조져!)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빨래를 쥐어짜듯 극한의 상황까지 밀어붙이면 최고의 경기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 훈련 중에 웃으면 신성한 훈련장에서 웃음이 나오냐며 처맞던 시절이다. 국가가 앞장서서 소수의 어린 선수를 선발하고 모든 자원을 집중해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 개인을 갈아 넣었다. 갈려 들어가던 선수들이 스스로 스포츠인으로서의 존엄을 선포한 것이다. 국가 주도 메달지상주의 담론의 한계였다.
2019년 조재범 사건 이후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개혁의 요구가 거셌다. 대통령까지 나서 스포츠계의 일대 변혁을 요구했고 사상 유래 없는 민관합동 스포츠혁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년간의 활동을 통해 일곱 개의 권고안을 발표했는데 이 새로운 스포츠 담론의 기저에는 ‘모두를 위한 스포츠’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 스포츠를 지배해온 국가주의, 메달지상주의 담론을 대체할 인권 담론을 천명한 것이다.
불행히도 대한민국 스포츠 개혁은 현장에 안착하기도 전에 기존 체육계의 거센 반발과 혁신위 권고안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세운 현 정부의 출범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일례로 학교 운동부의 주말대회 참가와 관련해 단계적으로 줄어가던 출석 인정 결석일 수는 올해 오히려 늘어났다. 목소리를 내야 할 체육계 학자들은 운동권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운운하며 인권 중심 담론의 태동을 막기 바쁘다. 운동권은 공부에 찌든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더 많은 운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그런 권리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도한 훈련으로 학습권을 박탈당한 채 전 세계 최장 시간 훈련을 이어가는 학교 운동부 학생 선수에게 더 많은 운동시간을 허용해 달라는 시대착오적 요구다.
‘모두의 운동장’을 향한 움찔거림을 시작하다
전문체육에 과하게 치우친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기형적 모습을 바로잡고 스포츠의 균형 잡힌 성장을 만들어내고자 일군의 사람들이 그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싸워왔다.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온전히 스포츠를 향유할 수 있도록 ‘모두의 스포츠’ ‘모두의 운동장’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시대에, 우선 스포츠에 관심을 가진 모든 시민이 함께 새로운 담론을 상상해야 한다. 말 그대로 시민의 힘, 시민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고, 함께 활동하며 개별적인 힘도 기르고 팀으로 발휘하는 힘도 키워야 한다. 스포츠 인권 운동과 대안스포츠 운동에 함께할 시민사회단체와 시민들이 꾸준하게 교류하고 협업하는 안전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마련하고, 대안스포츠의 상과 스포츠 시민운동의 장기적인 전망을 모색할 때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운동이 있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운동(exercise)과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공동체를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운동(movement). 우리의 제안은 이 둘이 엮이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운동으로 운동하자는 제안.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이 스포츠를 바라보는 다양한 언어의 생산이다. 국위선양과 영웅 서사로 점철된 스포츠계의 획일적인 언어에서 스포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고 일상의 한 부분으로 들이는 이야기를 많이 생산하고 널리 퍼트리고 싶다. <움직>은 이러한 담론 형성의 기능을 담당할 것이다. 새로운 시선으로 스포츠를 해석하는 다양한 목소리는 꼭 운동선수나 스포츠 관련 학자가 아니라도 자신의 스포츠 경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민 중심의 스포츠 담론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
한편 주류 스포츠 서사에서 보이지 않는 숨겨진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스포츠 시설물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분들이 바로 그 스포츠 시절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바꾸고 ‘기본권’으로서의 ‘스포츠권’을 실현하려고 <호호 체육관>을 열었다. 이곳에서 여성 청소노동자들은 요가로 몸을 풀고 배구를 배우며 공을 때린다. 닦고 쓰느라 늘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마침내 하늘로 치켜들고 공을 기다린다. 그들에게 체육관은 노동의 현장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삶의 공간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담론을 실험할 ‘모두의 운동회’. 주류 스포츠장에서 밀려나거나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모두가 즐겁고 안전하게 스포츠를 즐기는 공간이다. 성별, 장애, 인종, 나이로 인해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고 함께 즐기는 스포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모두의 운동회>는 성평등한 스포츠, 난민 아동을 위한 운동장, 대안적인 스포츠 교육과 환경, 더이상 환경을 해치지 않는 스포츠 행사 등을 고민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만드는 운동회다.
만약 이 시점에서 누군가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묻는다면, 당장은 “어떻게든”이라고 밖에 답하지 못하겠다. 위기의 시기에 어떻게든 모여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스포츠 담론은 상상하고 퍼트릴 생각이다. 우리의 작은 움찔이 모두의 거대한 움직임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움직여 주시길.
대한민국 스포츠 담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용철 | 문화연대 집행위원
다음 시대로 넘어온 스포츠, 과거로 돌아가려는 대한민국 체육계
국제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선수가 메달을 따면 가슴이 웅장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올라가면 머리에 붕대를 묶고 투혼을 발휘한 선수가 복받치는 듯 눈물을 쏟고 온 국민이 함께 훌쩍였다. 오랫동안 스포츠는 대한민국을 세상에 알릴 유일한 기회였다. 멀게는 손기정, 양정모, 차범근으로부터 가까이는 박세리, 박찬호, 박지성, 박태환, 김연아, 손흥민까지.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던 그들은 곧 국가를 상징했다. 어쩔 수 없이 스포츠는 무거웠고 비장했다. 한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경기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젠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일본대표팀에 대패한 한국 대표팀에게도 그런 악담을 퍼붓진 않는다. 비록 한국야구의 후진성을 비아냥거리고 KBO의 책임을 탓할지언정 일본에 졌다고 세상이 무너진 양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오타니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강백호의 경박함에 잠시 부끄러워도 그들의 뛰어남이나 우리의 부족함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미미하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내가 어떤 변화를 감지했던 건 소치올림픽 때 김연아의 인터뷰에서다. 완벽한 경기를 하고도 미심쩍은 판정으로 금메달을 놓친 김연아를 대신해 대한의 열혈 팬들이 밤새 조직위에 항의 청원을 넣었다. 그 청원의 수가 짧은 시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자 외신에서 한국인 집단행동의 병리적 원인을 물을 정도였다. 당시 흥분했던 국민과는 달리 당사자인 김연아 선수는 매우 의연한 자세로 은메달에 만족하며 실수 없이 마지막 경기를 마쳐 후련하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남겼다.
대중이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광란의 국가주의에 머물고 있을 때 한 선수는 이미 다음 시대의 스포츠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지 보여주고 있었다. 비슷한 상황이 평창에서도 벌어졌다. 보니 블레어 이후 첫 올림픽 3연패의 기회라는 언론의 의미 부여로 이상화의 500미터 금메달에 대한 기대(라고 쓰고 부담이라 읽는다)가 컸다. 결승에서 만난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경쟁해온 라이벌이자 친구로 이상화가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할 때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롤모델로 삼아 스케이트를 탔다. 2018년 평창에선 고다이라가 이상화를 제치고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을 때 경기를 마치고 엉엉 우는 이상화를 안고 고다이라는 ‘너는 나의 영원한 챔피언’이란 말을 남겼다. 스포츠에는 우리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온 메달보다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다음 시대로 성큼 건너갔다.
죽기 살기로 운동하는 시절엔 온갖 반인권적 방법이 넘쳐났다. 욕하고 때리는 건 기본이고 경기력을 올릴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의 훈련 방식을 전문가들은 ‘JJ(조져!)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빨래를 쥐어짜듯 극한의 상황까지 밀어붙이면 최고의 경기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 훈련 중에 웃으면 신성한 훈련장에서 웃음이 나오냐며 처맞던 시절이다. 국가가 앞장서서 소수의 어린 선수를 선발하고 모든 자원을 집중해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 개인을 갈아 넣었다. 갈려 들어가던 선수들이 스스로 스포츠인으로서의 존엄을 선포한 것이다. 국가 주도 메달지상주의 담론의 한계였다.
2019년 조재범 사건 이후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개혁의 요구가 거셌다. 대통령까지 나서 스포츠계의 일대 변혁을 요구했고 사상 유래 없는 민관합동 스포츠혁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년간의 활동을 통해 일곱 개의 권고안을 발표했는데 이 새로운 스포츠 담론의 기저에는 ‘모두를 위한 스포츠’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 스포츠를 지배해온 국가주의, 메달지상주의 담론을 대체할 인권 담론을 천명한 것이다.
불행히도 대한민국 스포츠 개혁은 현장에 안착하기도 전에 기존 체육계의 거센 반발과 혁신위 권고안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세운 현 정부의 출범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일례로 학교 운동부의 주말대회 참가와 관련해 단계적으로 줄어가던 출석 인정 결석일 수는 올해 오히려 늘어났다. 목소리를 내야 할 체육계 학자들은 운동권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운운하며 인권 중심 담론의 태동을 막기 바쁘다. 운동권은 공부에 찌든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더 많은 운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그런 권리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도한 훈련으로 학습권을 박탈당한 채 전 세계 최장 시간 훈련을 이어가는 학교 운동부 학생 선수에게 더 많은 운동시간을 허용해 달라는 시대착오적 요구다.
‘모두의 운동장’을 향한 움찔거림을 시작하다
전문체육에 과하게 치우친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기형적 모습을 바로잡고 스포츠의 균형 잡힌 성장을 만들어내고자 일군의 사람들이 그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싸워왔다.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온전히 스포츠를 향유할 수 있도록 ‘모두의 스포츠’ ‘모두의 운동장’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시대에, 우선 스포츠에 관심을 가진 모든 시민이 함께 새로운 담론을 상상해야 한다. 말 그대로 시민의 힘, 시민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고, 함께 활동하며 개별적인 힘도 기르고 팀으로 발휘하는 힘도 키워야 한다. 스포츠 인권 운동과 대안스포츠 운동에 함께할 시민사회단체와 시민들이 꾸준하게 교류하고 협업하는 안전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마련하고, 대안스포츠의 상과 스포츠 시민운동의 장기적인 전망을 모색할 때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운동이 있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운동(exercise)과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공동체를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운동(movement). 우리의 제안은 이 둘이 엮이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운동으로 운동하자는 제안.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이 스포츠를 바라보는 다양한 언어의 생산이다. 국위선양과 영웅 서사로 점철된 스포츠계의 획일적인 언어에서 스포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고 일상의 한 부분으로 들이는 이야기를 많이 생산하고 널리 퍼트리고 싶다. <움직>은 이러한 담론 형성의 기능을 담당할 것이다. 새로운 시선으로 스포츠를 해석하는 다양한 목소리는 꼭 운동선수나 스포츠 관련 학자가 아니라도 자신의 스포츠 경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민 중심의 스포츠 담론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
한편 주류 스포츠 서사에서 보이지 않는 숨겨진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스포츠 시설물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분들이 바로 그 스포츠 시절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바꾸고 ‘기본권’으로서의 ‘스포츠권’을 실현하려고 <호호 체육관>을 열었다. 이곳에서 여성 청소노동자들은 요가로 몸을 풀고 배구를 배우며 공을 때린다. 닦고 쓰느라 늘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마침내 하늘로 치켜들고 공을 기다린다. 그들에게 체육관은 노동의 현장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삶의 공간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담론을 실험할 ‘모두의 운동회’. 주류 스포츠장에서 밀려나거나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모두가 즐겁고 안전하게 스포츠를 즐기는 공간이다. 성별, 장애, 인종, 나이로 인해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고 함께 즐기는 스포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모두의 운동회>는 성평등한 스포츠, 난민 아동을 위한 운동장, 대안적인 스포츠 교육과 환경, 더이상 환경을 해치지 않는 스포츠 행사 등을 고민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만드는 운동회다.
만약 이 시점에서 누군가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묻는다면, 당장은 “어떻게든”이라고 밖에 답하지 못하겠다. 위기의 시기에 어떻게든 모여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스포츠 담론은 상상하고 퍼트릴 생각이다. 우리의 작은 움찔이 모두의 거대한 움직임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움직여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