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 후기
— 손끝에서 시작하는 애도
글쓴이 | 쏘냐
10년 전, 대학을 휴학하고 1년 정도 가족과 떨어져 독일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큰 마트나 빵집에서 기부한 식자재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채소나 과일, 빵의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잘 분류해 필요한 곳으로 다시 보내는 것이다. 그곳에서 반나절 일하면 집에 돌아갈 때 음식을 받아 갈 수 있었고 가난한 학생이었던 나는 종종 채소 다듬는 일을 했다. 춥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던 어느 겨울, 손끝에 물집이 잡히도록 일하고 한 아름 먹을 것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 생각난다. 지난 1월 27일, 이태원 기억 담기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잊고 있었던 이 기억이 떠오른 건 왜일까. 포스트잇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고 곰팡이를 닦고 다시 포스트잇을 기준에 따라 분류해 A4 용지에 정리하는 것. 온몸이 피로해지는지도 모르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 일은 채소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쉬는 시간도 무시하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도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 한몫했다(거기선 나 같은 한국인이 오면 싫어했다. 눈치 보이게 쉬지도 않고 일한다고ㅎㅎ).
활동에 참여하고 호기롭게 후기를 쓰겠다고 했지만, 이 글을 쓰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하루 4시간, 내가 무언가를 했다고 쓴다는 것이 죄스러울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뜬금없지만 개인적인 기억에서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10.29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이후부터 2024년 1월, 기억 담기 활동을 하기 전까지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애도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참사 직후 무차별적으로 보도된 현장은 비슷한 트라우마가 있는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운 장면이었다. 다음 날 출근길, 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지하철을 타지 못해 몇 대를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쉬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몰려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1주기가 지나도록 추모 포스트잇 한 장 쓰는 일이 원고지 몇백 장 쓰는 것처럼 막막하고 두려웠다.
해가 한번 더 바뀌고 우연히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을 알게 되었다. 감정적으로 무너져버릴까 봐 또 주저앉아버릴까 봐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문화연대에 올라온 활동 후기를 읽으며 ‘일단 가보자’ 결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단순했다. ‘수북이 쌓인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더러워진 부분을 도려내고 먼지를 털고 깨끗한 종이에 옮겨 붙이는 것’이 다였다. 걱정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더 차분해졌다. 손끝, 우습게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마침내 이태원 참사와 이어졌다.
활동 이후 처음으로 나는 참사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특집 기사를 찾아 읽었다. 포스트잇에서 몇 번 보았던 이름을 발견하면 한동안 울기도 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슬픔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작은 포스트잇에 어떤 단어부터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손끝에 생긴 굳은살처럼 그저 작더라도 내 몸으로, 내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으로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싶다.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 후기
— 손끝에서 시작하는 애도
글쓴이 | 쏘냐
10년 전, 대학을 휴학하고 1년 정도 가족과 떨어져 독일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큰 마트나 빵집에서 기부한 식자재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채소나 과일, 빵의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잘 분류해 필요한 곳으로 다시 보내는 것이다. 그곳에서 반나절 일하면 집에 돌아갈 때 음식을 받아 갈 수 있었고 가난한 학생이었던 나는 종종 채소 다듬는 일을 했다. 춥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던 어느 겨울, 손끝에 물집이 잡히도록 일하고 한 아름 먹을 것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 생각난다. 지난 1월 27일, 이태원 기억 담기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잊고 있었던 이 기억이 떠오른 건 왜일까. 포스트잇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고 곰팡이를 닦고 다시 포스트잇을 기준에 따라 분류해 A4 용지에 정리하는 것. 온몸이 피로해지는지도 모르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 일은 채소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쉬는 시간도 무시하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도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 한몫했다(거기선 나 같은 한국인이 오면 싫어했다. 눈치 보이게 쉬지도 않고 일한다고ㅎㅎ).
활동에 참여하고 호기롭게 후기를 쓰겠다고 했지만, 이 글을 쓰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하루 4시간, 내가 무언가를 했다고 쓴다는 것이 죄스러울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뜬금없지만 개인적인 기억에서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10.29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이후부터 2024년 1월, 기억 담기 활동을 하기 전까지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애도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참사 직후 무차별적으로 보도된 현장은 비슷한 트라우마가 있는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운 장면이었다. 다음 날 출근길, 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지하철을 타지 못해 몇 대를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쉬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몰려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1주기가 지나도록 추모 포스트잇 한 장 쓰는 일이 원고지 몇백 장 쓰는 것처럼 막막하고 두려웠다.
해가 한번 더 바뀌고 우연히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을 알게 되었다. 감정적으로 무너져버릴까 봐 또 주저앉아버릴까 봐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문화연대에 올라온 활동 후기를 읽으며 ‘일단 가보자’ 결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단순했다. ‘수북이 쌓인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더러워진 부분을 도려내고 먼지를 털고 깨끗한 종이에 옮겨 붙이는 것’이 다였다. 걱정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더 차분해졌다. 손끝, 우습게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마침내 이태원 참사와 이어졌다.
활동 이후 처음으로 나는 참사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특집 기사를 찾아 읽었다. 포스트잇에서 몇 번 보았던 이름을 발견하면 한동안 울기도 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슬픔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작은 포스트잇에 어떤 단어부터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손끝에 생긴 굳은살처럼 그저 작더라도 내 몸으로, 내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으로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