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성명


[스포츠로 사유하기]폭력의 조건(19호)

[스포츠로 사유하기] 19호  

폭력의 조건

  정재영 (체육문화위원회 활동가)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영혼 속에 어둠이 있으면 죄가 저질러지오. 그러나 진정한 죄인은 어둠 속에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그 영혼 속에 어둠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위고의 말은, 사건의 발생은 늘 사회적 조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인간적인 조언으로 보인다. 문득 <레미제라블>의 한 구절이 떠오른 건 최근 스포츠계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폭행 사건 때문이다. 전주의 모대학 사격부에선 선배가 후배를 훈계한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해 피해자가 장애를 입는 일이 벌어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광운대학교 아이스하키부 역시 신입생을 폭행한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또한 파주의 어느 유소년 축구단에서는 감독과 코치가 행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한 청소년 선수에게 폭행을 행사했고, 피해를 당한 선수 역시 주위 선수들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사진 출처: 시사매거진 2580
언뜻 보면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폭력을 행사한 개인의 잘못으로 그 책임을 돌릴 수 있다. 윤리적 감수성이 빈약하고 충동을 절제하지 못한 이들이 벌인 일종의 폭력극. 그러나 한국 스포츠계의 폭력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문제가 아니다. 폭력은 한국사회의 서글픈 단면이다. 그리고 지금의 스포츠계는 폭력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어느 영역보다 잘 갖추어져 있다. 첫 번째 조건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스며든 폭력에 대한 둔감함이다. 만약 코치나 감독이 선수를 때린 일이 발생했다면(혹은 부모가 자식을 때렸다면), 그것은 ‘폭력’이라기보다는 ‘훈계’의 의미가 강하다고 강변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훈계’를 정당화해주는 ‘사랑의 매’라는 적절한 단어가 있지 않은가.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사랑의 매’도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집단문화가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폭력이 애정과 관심으로 통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알량한 권위주의와 천박한 마초이즘 역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떨어뜨린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감히’, ‘주제를 알고 행동해야지’. ‘남자는 그럴 수도 있지’와 같은 익숙한 문장들은 쉽사리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작용한다.
사진 출처: www.yourepeat.com
두 번째 조건은 ‘학벌주의’와 ‘성과주의’다. 2012년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가 실시한 ‘스포츠폭력 실태조사’에는 흥미로운(?) 결과가 하나 있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무려 절반에 가까운 46.7%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구타를 인지했으나 필요한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일이란 곧 자녀의 ‘성과’를 의미한다. 자식이 구타를 당하더라도 좋은 성적을 내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학부모들의 인식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녀를 보호해야 할 부모가 폭력을 용인하는데, 어떻게 폭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대학에 진학해야만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학벌주의’가 반영된 결과이며,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성과주의’의 소산이다. 위의 두 가지 조건에 힘입어, 국가주도의 엘리트스포츠는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로지 ‘국가대표’와 ‘금메달’을 위해 모든 것을 운동에 바치는 엘리트스포츠 시스템은 코치진과 학생들 모두에게 성과에 대한 압박을 불어 넣으며, 합숙의 이름으로 학생들을 한 곳에 몰아넣어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문제는 국가가 이를 해결할 의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선수들이 고생하더라도 금메달을 쟁취해내기만 한다면 산재한 문제점들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며, 결국 한국 스포츠는 잘 굴러가고 있다는 ‘환상’을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포츠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폭력 가해자는 양산된다. 비유하자면 한국 스포츠계는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토양이 이미 조성되어 있다. 물론 구조를 치유한다고 해서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폭력성은 인간의 본능이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범죄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우발적 범행과 구조에서 파생된 범행은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여기서 다시 빅토르 위고의 말로 돌아가 본다. 스포츠계에서 폭력 가해자가 또 다시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 영혼 속에 어떤 어둠을 심어 놓지는 않았는가?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