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성명


논평괴물의 귀환, 진정성의 탈을 쓴 비진정성 - 고은 복귀 사태에 부쳐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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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대 논평]


괴물의 귀환, 진정성의 탈을 쓴 비진정성

- 고은 복귀 사태에 부쳐 





최근 실천문학사는 <고은과의 대화>라는 대담집과 <무의 노래>라는 신작 시집을 잇달아 출간했다. 2017년 9월 <황해문화>에 최영미 시인이 ‘괴물’이란 시를 발표하고 고은 시인의 성추행 정황을 폭로한 지 5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다. 


지난 5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찬찬히 복기해 보자. 매해 노벨상 시즌만 되면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곤 하던 재야 원로 시인 고은. 그는 성추행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괴물이라고 부른 시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10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1심과 2심에서 무혐의 판결이 나는 동안 고은 시인은 단 한 번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다. 공황장애가 이유였다. 돈이 없어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려고 성추행을 폭로했다는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 10년간 소득 내역을 뽑아 법원에 제출했다는 시인은 전 지구적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는 "En"의 치졸함에 치를 떨었다. 


전 지구적 시인. 차마 돈 주고 살 순 없어 서점에 서서 읽은 <고은과의 대화> 표지에 적힌 그에 대한 찬사다. 인도계 캐나다 시인인 라민 자한베글루가 고은과의 대화를 엮어 2020년에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손해배상소송 2심에서 패소하고 상고를 포기한 시점이 2019년 12월이니 공황장애로 법정에 나서지 못했던 시인은 그 즈음에 저명한 외국 시인과 화기애애한 대담을 진행했을 것이다. 이 대담집 어디에도 성추행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대문호로 상재될 뿐이다. 이 책의 추천평을 쓴 윤현룡 작가의 글을 인용한다.


이 대화집을 읽으면서 나는 질문과 답변과 첨부한 시가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음에 놀라고 행복했다. 그리고 비로소 고은이 왜 전 지구적 시인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보았다. 싯달타와 장자를 보았다. 토인비와 사르트르를 보았다. 네루다와 보르헤스와 마야코프스키와 타고르를 보았다. 간디와 만달라를 보았다. 혜능과 임제와 지산을 보았다. 김시습과 김삿갓을 보았다. 막스 플랑크와 에르빈 슈뢰딩거를 보았다.


이쯤 되면 한 시인의 의도적인 침묵을 넘어 문단 전반에 깔린 집단적인 망각을 의심하게 된다. 최영미 시인이 최근 지적한 대로 그야말로 ‘위선을 실천하는 문학’일 테다.


오그라드는 몇몇 문사들의 찬사와는 반대로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시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다행스럽게도!) 매우 싸늘하다. 문학전문매체 뉴스페이퍼가 지난 7~8일 1989명에게 ‘고은 시인의 문단 복귀’에 대해 조사한 결과 복귀를 반대한 사람은 1973명(99.2%)으로, 찬성한 사람은 고작 0.8%(16명)에 불과했다. 고은 시인이 자숙해야 할 기간에 대해서도 거의 대부분의 응답자(97.8%)가 복귀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괴물을 찬양하는 평을 들었으니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금 박한 평도 들어보자. 당대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1986년에 나온 고은의 신작 <전원시편>을 읽고 3월 28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에 대해 나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중략]... 무의식적인 오문들(예: 나는 그 영감 생시보다는 손톱만치 달라져야겠구나), 달관의 제스처 섞인 선적 언어의 비-선적 남용(예: 벌써 별 하나 떠 이 세상이 우주이구나 – 이 무슨 소리!), 지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 등의 토포스들이 넘실대는 이 시편들은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31쪽)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니! 우리가 이제 알게 된 괴물의 진면목을 명민한 평론가는 무려 37년 전에 간파했구나. 5년 전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된 괴물의 정체. 이제 이 사건의 병증은 한 문단 원로의 일탈에서 그를 둘러싼 문단 권력의 위선과 그를 추앙하는 무감한 패거리에게로 옮아가고 있다.


썩어가는 환부를 꽁꽁 싸매 숨기는 방식으로는 영영 치유할 수 없다. 환부를 둘러싼 냄새나는 붕대를 거두고 찬란한 태양 아래로 환부를 드러내야 한다. 만약 바람과 태양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면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어쩌면 이미 자연치유의 시기는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환부가 제거되지 않는 한 한국의 문학계는 당분간 ‘진정성의 탈을 쓴 비진정성’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2023년 1월 18일 

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