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경하는 재판장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파기환송심 판결을 앞두고 엄벌을 촉구하는 탄원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2020년 1월 30일 대법원은 판결 선고와 함께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주의) 파기환송의 취지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관한 법리오해와 그로 인한 심리미진’임. 반드시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라고 할 수 없음” (보도자료 8쪽 각주)이라고 하였던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법원은 파기환송의 취지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이 종전에도 문체부에 업무협조나 의견 교환 등의 차원에서 명단을 송부하고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 사건 공소사실에서 의무 없는 일로 특정한 각 명단 송부 행위와 심의 진행상황 보고 행위가 종전에 한 행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피는 방법으로 법령 등의위반 여부를 심리하여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법원의 선고 직후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이러한 파기환송 취지에 아쉬움을 표명한 바있습니다. 이 사건 이전에도 공공기관 직원들이 문체부에 업무협조 차원에서 특정한 각 명단을 송부하거나 심사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다면 그것은 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상급 기관의 부당한 심사 개입 행위가 있었는지 살펴보라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지적해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의 공모사업 심사는 독립된 심사위원회가 공정성을 바탕으로 엄격하게 심의한 후 그 과정과 결과만을 사후에 발표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사전에 신청자 명단이나 심의 진행 상황을 상급 기관에 보고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부당한 심사 개입 여지를 주는 행위로, 이러한 목적 이외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종전에도 각종 명단과 심사 진행 상황을 문체부에 보고한 사례가 있다는 것은 당시에도 부당한 심사 개입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매우 중요한 단서일 뿐 의무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난 11월 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영화배우 문성근 등 37명이 제기한 MB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국가의 책임은 시효 완성). 이 사건 이전인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것으로, 예술위 직원들의 명단 송부나 심사진행 상황 보고 행위가 부당한 심사 개입을 위한 목적이었다는 개연성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에서 특별검사가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과 사무관의 PC에서 압수한 ‘민원리스트’나, 문체부의 자체 블랙리스트조사위원회에서 입수한 예술위의 ‘의원실 민원관리 현황(2016)’ 문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원’이 들어온 신청자 명단이 실제 접수되었는지 상급기관이 사전에 확인하고 심사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선정되도록 한 후 처리 결과까지 국회의원이나 정관계 주요 인사 등 민원인에게 사후에 보고하는 일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블랙리스트는 상급기관으로부터 배제 명단을 전달받은 공공기관 직원들이 심사위원들에게 실행을 부탁하여 이행한 사례가 대부분입니다. 부끄러운 일이나 이러한 ‘관행’의 존재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실행될 수 있는 토양이었습니다. 예술위 직원들이 이 사건 이전에도 각 명단을 송부하거나 심사진행 상황을 보고한 적이 있다는 진술은 바로 이러한 불법적 ‘관행’이 통상적인 ‘의무’처럼 존재하였던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부당한 심사 개입 행위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한국의 문화예술지원 기관의 역사에서 대단히 오래된 악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검열연구회 등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식민지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 권력은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통제하고 권력에 우호적인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국가권력의 정책홍보 수단으로 동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치며 문화예술인들은국가권력의 통제를 거부하고 국가와 시민사회 내부의 비판적 성찰을 미학적으로 수행하면서 민주주의를 내면화하는 역할을 자임하여 왔습니다. 피고인들이 이렇듯 변화된 국가권력과 문화예술의 관계를 과거 유신시대로 되돌리려고 하였던 것이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수사과정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민주화 이후 입사한 공무원들조차도 그러한 과거 회귀를 내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헌법재판소가 블랙리스트 사건을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는 중대한 위헌행위로 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대법원이 다시 살펴보라고 하였던 이 사건 이전 각 명단 송부 행위와 심사 진행 상황 보고 행위도 의무 없는 행위였다고 선언하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선고는 현재에도 암암리에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있는 공직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캐비넷 속에 잠겨 있는 한국문화예술통제사의 문을 열어주는 역사적 행위 또한 될 것입니다.
한편 대법원이 피고인들의 공동정범 성립 범위와 관련하여 각 연도별 사업 사이에 포괄일죄가 성립한다고 보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이 사건에서 범죄의 개수는 각 연도별 혹은 각 사업별로 따질 것이 아니라 각 사건 피해자의 수를 기준으로 따져야 합니다. 이 사건 증거로 제출된 ‘2015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추진상황’ 문서가 보여주는 것은 심사를 통해 배제하지 못한 ‘특이사항’이 발생할 경우 개별 예술인이나 단체를 배제하기 위해 별도 방안까지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경우 심사위원을 재소집하여 심사 결과를 번복하게 하거나 피해자에게 포기 각서를 받아내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는 1차 당사자를 넘어 2차, 3차 피해로 확대되었습니다. 가령 극단 대표가 배제되면서 공연에 참여하기로 하였던 배우, 스태프 등이 모두 공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인은 세계를 자신의 일부로 느끼는 감각을 날마다 벼리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이미 선정되었던 작품 발표 기회를 잃은 예술인이 공공기관(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어 작품 활동 자체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한 삶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피고인들의 죄책은 포괄일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각 피해자의 숫자만큼 개별적 범죄행위로 다시 산정하여 판정하여야 합니다. 한편 김기춘 피고인의 퇴임 이후 지원배제 행위들은 피고인이 만들어놓은 ‘정책’으로서 지속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에 범죄 행위 이후 가중된 결과를 더욱 무겁게 달아서 죄책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들 7인에 대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성립을 다투는 이 재판에서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공범으로 기소되는 대신 상급 기관의 부당한 지시에 따라 의무 없는 일을 해야했던 피해자로 다뤄졌습니다. 심사위원들 역시 부당하게 심사의 독립성을 침해당한 피해자로서만 다뤄졌습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일종의 조직범죄로서 수괴나 간부에 해당하는 피고인들의 지시를 공공기관 직원들과 심사위원들이 공모하여 실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실상에 가깝습니다. 강요죄가 모두 무죄가 나온 것에서 보듯 공모자들은 현저하게 의사의 억압을 받았다기보다는 공직자로서 감수해야 할 불이익을 예술인들에게 전가하는 합리적 선택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형법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구조적으로는 내란죄나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였던 관료제에서나 확인 가능한 것이어서 ‘문화적 제노사이드’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한편 피고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이 사건으로 기소된 범죄행위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사실도 환기하고자 합니다. ‘문제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 방안’ 보고서가 보여주듯 피고인들의 블랙리스트는 정부의 모든 부처를 대상으로 하였던 것이고, 문체부 역시 모든 실·국과 그 산하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특별검사의 활동 기간이 제한되었던 관계로 정부 부처 중에서는 문체부, 문체부 중에는 콘텐츠국 산하 영진위, 예술국 산하 예술위, 미디어국 산하 출판진흥원 등 3곳에서 이루어진 지원배제 행위만을 기소하였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사죄하고 반성하는 대신 이 사건의 본질이 마치 국가보조금의 낭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비정상의 정상화’라거나 하는 식으로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여주었을 뿐 어느 누구도 정부 운영의 파행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예술인들은 이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대한민국의 시민입니다. 피고인들은 한때 대한민국 행정부의 의사결정권을 사실상 독점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국민 9,473명을 상대로 자행한 권력남용(국가폭력)은 매우 엄중한 단죄를 받아야 합니다. 한편 이 사건에서 기소되지 않은 채 여전히 현직에서 고위직을 수행하고 있는 다른 공직자들도 공범으로서 죄책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선고해 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우리는 피고인들에 대한 단죄를 계기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 12. 01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문화연대, 블랙리스트 이후,
영화계 블랙리스트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모임,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 예술인 일동
존경하는 재판장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파기환송심 판결을 앞두고 엄벌을 촉구하는 탄원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2020년 1월 30일 대법원은 판결 선고와 함께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주의) 파기환송의 취지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관한 법리오해와 그로 인한 심리미진’임. 반드시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라고 할 수 없음” (보도자료 8쪽 각주)이라고 하였던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법원은 파기환송의 취지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이 종전에도 문체부에 업무협조나 의견 교환 등의 차원에서 명단을 송부하고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 사건 공소사실에서 의무 없는 일로 특정한 각 명단 송부 행위와 심의 진행상황 보고 행위가 종전에 한 행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피는 방법으로 법령 등의위반 여부를 심리하여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법원의 선고 직후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이러한 파기환송 취지에 아쉬움을 표명한 바있습니다. 이 사건 이전에도 공공기관 직원들이 문체부에 업무협조 차원에서 특정한 각 명단을 송부하거나 심사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다면 그것은 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상급 기관의 부당한 심사 개입 행위가 있었는지 살펴보라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지적해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의 공모사업 심사는 독립된 심사위원회가 공정성을 바탕으로 엄격하게 심의한 후 그 과정과 결과만을 사후에 발표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사전에 신청자 명단이나 심의 진행 상황을 상급 기관에 보고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부당한 심사 개입 여지를 주는 행위로, 이러한 목적 이외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종전에도 각종 명단과 심사 진행 상황을 문체부에 보고한 사례가 있다는 것은 당시에도 부당한 심사 개입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매우 중요한 단서일 뿐 의무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난 11월 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영화배우 문성근 등 37명이 제기한 MB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국가의 책임은 시효 완성). 이 사건 이전인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것으로, 예술위 직원들의 명단 송부나 심사진행 상황 보고 행위가 부당한 심사 개입을 위한 목적이었다는 개연성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에서 특별검사가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과 사무관의 PC에서 압수한 ‘민원리스트’나, 문체부의 자체 블랙리스트조사위원회에서 입수한 예술위의 ‘의원실 민원관리 현황(2016)’ 문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원’이 들어온 신청자 명단이 실제 접수되었는지 상급기관이 사전에 확인하고 심사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선정되도록 한 후 처리 결과까지 국회의원이나 정관계 주요 인사 등 민원인에게 사후에 보고하는 일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블랙리스트는 상급기관으로부터 배제 명단을 전달받은 공공기관 직원들이 심사위원들에게 실행을 부탁하여 이행한 사례가 대부분입니다. 부끄러운 일이나 이러한 ‘관행’의 존재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실행될 수 있는 토양이었습니다. 예술위 직원들이 이 사건 이전에도 각 명단을 송부하거나 심사진행 상황을 보고한 적이 있다는 진술은 바로 이러한 불법적 ‘관행’이 통상적인 ‘의무’처럼 존재하였던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부당한 심사 개입 행위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한국의 문화예술지원 기관의 역사에서 대단히 오래된 악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검열연구회 등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식민지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 권력은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통제하고 권력에 우호적인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국가권력의 정책홍보 수단으로 동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치며 문화예술인들은국가권력의 통제를 거부하고 국가와 시민사회 내부의 비판적 성찰을 미학적으로 수행하면서 민주주의를 내면화하는 역할을 자임하여 왔습니다. 피고인들이 이렇듯 변화된 국가권력과 문화예술의 관계를 과거 유신시대로 되돌리려고 하였던 것이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수사과정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민주화 이후 입사한 공무원들조차도 그러한 과거 회귀를 내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헌법재판소가 블랙리스트 사건을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는 중대한 위헌행위로 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대법원이 다시 살펴보라고 하였던 이 사건 이전 각 명단 송부 행위와 심사 진행 상황 보고 행위도 의무 없는 행위였다고 선언하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선고는 현재에도 암암리에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있는 공직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캐비넷 속에 잠겨 있는 한국문화예술통제사의 문을 열어주는 역사적 행위 또한 될 것입니다.
한편 대법원이 피고인들의 공동정범 성립 범위와 관련하여 각 연도별 사업 사이에 포괄일죄가 성립한다고 보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이 사건에서 범죄의 개수는 각 연도별 혹은 각 사업별로 따질 것이 아니라 각 사건 피해자의 수를 기준으로 따져야 합니다. 이 사건 증거로 제출된 ‘2015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추진상황’ 문서가 보여주는 것은 심사를 통해 배제하지 못한 ‘특이사항’이 발생할 경우 개별 예술인이나 단체를 배제하기 위해 별도 방안까지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경우 심사위원을 재소집하여 심사 결과를 번복하게 하거나 피해자에게 포기 각서를 받아내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는 1차 당사자를 넘어 2차, 3차 피해로 확대되었습니다. 가령 극단 대표가 배제되면서 공연에 참여하기로 하였던 배우, 스태프 등이 모두 공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인은 세계를 자신의 일부로 느끼는 감각을 날마다 벼리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이미 선정되었던 작품 발표 기회를 잃은 예술인이 공공기관(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어 작품 활동 자체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한 삶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피고인들의 죄책은 포괄일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각 피해자의 숫자만큼 개별적 범죄행위로 다시 산정하여 판정하여야 합니다. 한편 김기춘 피고인의 퇴임 이후 지원배제 행위들은 피고인이 만들어놓은 ‘정책’으로서 지속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에 범죄 행위 이후 가중된 결과를 더욱 무겁게 달아서 죄책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들 7인에 대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성립을 다투는 이 재판에서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공범으로 기소되는 대신 상급 기관의 부당한 지시에 따라 의무 없는 일을 해야했던 피해자로 다뤄졌습니다. 심사위원들 역시 부당하게 심사의 독립성을 침해당한 피해자로서만 다뤄졌습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일종의 조직범죄로서 수괴나 간부에 해당하는 피고인들의 지시를 공공기관 직원들과 심사위원들이 공모하여 실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실상에 가깝습니다. 강요죄가 모두 무죄가 나온 것에서 보듯 공모자들은 현저하게 의사의 억압을 받았다기보다는 공직자로서 감수해야 할 불이익을 예술인들에게 전가하는 합리적 선택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형법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구조적으로는 내란죄나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였던 관료제에서나 확인 가능한 것이어서 ‘문화적 제노사이드’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한편 피고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이 사건으로 기소된 범죄행위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사실도 환기하고자 합니다. ‘문제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 방안’ 보고서가 보여주듯 피고인들의 블랙리스트는 정부의 모든 부처를 대상으로 하였던 것이고, 문체부 역시 모든 실·국과 그 산하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특별검사의 활동 기간이 제한되었던 관계로 정부 부처 중에서는 문체부, 문체부 중에는 콘텐츠국 산하 영진위, 예술국 산하 예술위, 미디어국 산하 출판진흥원 등 3곳에서 이루어진 지원배제 행위만을 기소하였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사죄하고 반성하는 대신 이 사건의 본질이 마치 국가보조금의 낭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비정상의 정상화’라거나 하는 식으로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여주었을 뿐 어느 누구도 정부 운영의 파행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예술인들은 이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대한민국의 시민입니다. 피고인들은 한때 대한민국 행정부의 의사결정권을 사실상 독점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국민 9,473명을 상대로 자행한 권력남용(국가폭력)은 매우 엄중한 단죄를 받아야 합니다. 한편 이 사건에서 기소되지 않은 채 여전히 현직에서 고위직을 수행하고 있는 다른 공직자들도 공범으로서 죄책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선고해 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우리는 피고인들에 대한 단죄를 계기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 12. 01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문화연대, 블랙리스트 이후,
영화계 블랙리스트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모임,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 예술인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