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성명


논평‘탈권위’의 문화정책을 위해 : 블랙리스트 적폐청산과 ‘예술인의 지위에 관한 권고’

[ 19대 대선 특집 논평 ]

‘탈권위’의 문화정책을 위해 : 
블랙리스트 적폐청산과 ‘예술인의 지위에 관한 권고’

박소현  |  문화연대집행위원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첫 주는 연일 ‘탈권위, 파격, 소통’ 행보로 표현되며, 새로운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이러한 기대감은 문화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은 예술현장의 요구를 수용해 ‘문화계 블랙리스트 적폐청산’을 문화정책의 1순위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문화행정을 바로 세우는 개혁 역시 이로부터 출발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블랙리스트가 문화부분의 가장 큰 현안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다만, 그 구체적인 공약의 세부항목에서 청산해야 할 적폐가 ‘문화예술 지원’과 관련된 제도적 원칙과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점은 다소 경계할 일로 보인다. 물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이 정부지원에 의존하는 정도가 큰 만큼 지원정책의 전반적인 개혁은 예술가들이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수준에서 창작여건을 개선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지원정책의 개혁을 위한 각론들이 성공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블랙리스트를 강제할 수 있었던 정부의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와 권위주의적인 행정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이 동반되어야 한다. 예술현장에서 요구한 ‘적폐청산’은 이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문화정책’이라는 용어를 ‘문화행정’으로 대체하고, ‘행정의 문화화’를 중요한 과제로 삼고자 한 역사가 있다. ‘문화정책’이라는 용어가 태생적으로 전체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국가가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공급하고 동원하는 형식의 ‘문화정책’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금기어로 간주되었고, 이를 대체한 용어가 ‘문화행정’이었다. 그러나 이 ‘문화행정’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행정편의주의 내지 행정우선주의로서 비판을 받았고,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행정의 문화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행정의 문화화’란 매뉴얼화한 행정, 칸막이 행정으로 대변되는 불통의 행정편의주의 및 권위주의,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뿌리 깊은 관행을 개혁하려는 열망을 담은 슬로건이었다. 여기에서 ‘문화’는 권위주의적인 행정시스템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개혁 가치를 집약한 개념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정책의 근본적 개혁은 문화정책에 대한 상상력을 예술(인)정책이나 문화산업정책 영역에 결박해 두는 관행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의 원천이자 시금석이고, 민주주의를 위한 열린 공론장으로서 표현의 자유와 문화다양성의 거점이 되어야 하며, 약탈적인 경제 및 노동구조를 견제하며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는 실질적인 지렛대 중 하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술(인)정책이나 문화산업정책을 과소화하거나 주변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적 상상력 속에서 비로소 기존의 예술(인)정책과 문화산업정책이 ‘정상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의 문화정책이 문화를 결정하는 행정우선주의에서 탈피해, 문화에 대한 사회적·시민적 상상력이 문화정책을 새롭게 틀 지울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새로운 대통령의 ‘탈권위’ 행보가 청와대를 넘어서 정부조직 전반에 스며들어, 문화정책의 근본적 개혁을 추동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블랙리스트의 적폐청산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같은 일부 지원기관의 개혁과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정책의 주무부처 및 그 산하기관 전반(국립 문화예술기관 등), 그리고 지방정부의 문화 관련 행정기관 등에서 권위주의와 독선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청산하는 것까지를 포괄해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정책은 특정 문화행정기관의 전유물일 수 없다. ‘탈권위’의 문화정책을 위해서는, 문화정책과 문화행정이 개념적으로 호환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다소 인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문화정책을 문화에 관한 광범위하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사회적 의사결정과정으로, 문화행정을 이러한 의사결정과정을 통해서 결정된 사안을 충실히 실행하는 과정으로 구분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리고 이 문화정책이라는 의사결정과정이 개방적, 참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정책의 새로운 공간은 문화행정기관이 독점하는 장소가 아니라, 문화의 다양한 주체들이 모이는 공론장이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문화기본법>이 정한 ‘문화권’은 문화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자기규정과 사회적 논의를 문화예술인을 포함한 국민 일반의 권리로 규정하는 데에까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 정부의 문화정책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과제는 예술인의 정신적·경제적·사회적 권리 보장의 제도적 근거 마련을 위해 유네스코의 ‘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를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1980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제2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이 권고는 단순히 예술인복지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예술가의 시민권과 노동자성, 문화정책에서의 지위 등을 포괄하는 혁신적 사항들을 담고 있다. 이 권고에서 ‘지위’라는 개념은 “한편으로는 한 사회에서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역할에 따르는 중요성을 기초로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존중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제 권리를 포함하여, 특히 예술가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소득과 사회보장과 관계되는 제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국제노동기구가 정하는 노동 및 고용에 관한 법적 조건들의 적용을 받을 것과 함께, 예술활동을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로 간주해 예술가에 대한 경제적 보호가 당연히 제공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예술가들이 그들 자신의 사회와 세계의 전반적인 진보에 기여하는 그 중요성을 강조하여 지역적·국가적 문화정책의 형성에 예술가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물론 이러한 예술가의 지위와 관련한 여론 형성도 국가의 과업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어찌 보면 블랙리스트 적폐청산의 원칙과 방향은 이 ‘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를 반영하겠다는 한 줄의 대선 공약에서 상당 부분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의 문화정책을 고려할 때 이 권고의 반영은 논쟁적인 측면들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더욱이 이 권고의 이행 과정은 문화에 관한 사회적인 공론장을 활성화시키고, 더 이상 문화행정과 호환되지 않는 ‘탈권위’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