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성명


논평[주간논평] 동의받지 않은 보호는 폭력이다. - 4월 29일 청소년 보호법 개정을 보며.

2011-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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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논평] 


동의받지 않은 보호는 폭력이다. - 4월 29일 청소년 보호법 개정을 보며.

 

지난 4월 29일 오랜 논란이었던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 했다. 이번 개정안에는 만 16세미만 청소년들의 게임이용을 0시부터 6시까지 강제적으로 차단하는 내용의 '셧다운제‘가 포함되어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 제기되었으나 실효성 논란, 기본권 침해, 산업발달의 저해 등의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법제화 되지 못했던 셧다운제가 갑작스럽게 추진된 이유는 무엇일까?

 

2010년 여성부에서 여성가족부로 전환되며, 출산장려 정책 외에 제시할 카드가 부족했던 여가부에서 모든 청소년 정책을 ‘가족화’ 하며 ‘청소년 보호’ 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인 폭력적, 인권침해 법률이 바로 셧다운제다. 통합된 이후 언론보도에서 자극적인 사건들의 원인으로 게임이 지목하자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2004년부터 제기되었으나 수많은 논란이 있어 추진되지 못했던 케케묵은 법안 셧다운제를 급하게 꺼내든 것이다. 전시성 행정에 불과 한만큼 시작부터 셧다운제는 많은 문제점과 우려를 낳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입법학회에서는 셧다운제가 시행되어도 94.4%의 청소년들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거나, 다른 게임, 인터넷등을 이용하겠다는 조사 결과로 셧다운제의 실효성에 우려를 표하며 위헌적 법률이라는 입장을 전달한바 있다. 수면권을 보장하겠다는 셧다운제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터넷 강의를 포함하여 모든 인터넷 활동을 중단시켜야만 가능할 것이다. 오로지 게임에만 한정되어 있는 셧다운제로는 청소년들의 수면권, 건강권을 지킨다는 본래의 목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셧다운제는 실효성 측면에서 규제만 존재할 뿐 범위도, 대책도, 구체적인 규칙조차도 협의 된 바가 없으며 심지어 법률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한 졸속 법안이다. 또한, 오랜 논란이 되었던 연령기준조차도 지난해 12월 문광부와 여가부의 밀실협약으로 진행되어 그 어떤 법률적 근거도 사례도 없는 만 16세로 추진된 것 역시 준비가 부족한 법안임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청소년 단체와 문화단체, 학부모, 게임업계등 각계에서 청소년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문화적 권리를 박탈하는 위헌적 법률이라는 비판에도 여가부의 의지는 강력하다.


청소년 보호법인가 문화표현규제를 위한 제 2의 국가 보안법인가?

  80년대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많은 문화매체들이 철퇴를 맞았다. 요즘 그때의 금지곡들의 금지 사유들이 예능에서조차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이념의 통제’는 수많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강력한 기준이었다. 97년 미성년자 보호법이 청소년 보호법으로 바뀌면서 ‘이념의 통제’는 ‘청소년 보호’ 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그동안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규제 원칙들은 이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확대되며 각각의 매체별 등급위에서 진행된 일들을 일괄적으로 통합하여 규제하는 강력한 법적장치가 마련된 셈이다. 이처럼 청소년 보호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보호’ 란 청소년들의 삶과 인권, 문화와 교육, 복지가 아닌 청소년 유해매체의 감시와 규제에 불과하며 이런 정책의 가장 큰 전제이자 담론은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에서 시작된다.

미래의 주역이 청소년임을 인정하나 현재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판단능력이 없는 미성숙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소외되어 정작 청소년 보호법의 법적 대상인 청소년들은 스스로의 권리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사회적 활동과 참여에 대한 기성세대의 불편한 시각을 담고 있으며 청소년들의 삶에서 정작 청소년들을 배제시키는 폭력적 행위이다. 이번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의 셧다운제 도입 역시 청소년 보호론을 앞세워 청소년들의 삶/행동을 국가와 부모가 통제하고 감시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소년 당사자들을 향한 정책이 청소년들과의 단 한차례의 공청회도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 청소년 당사자들을 비롯하여 각계의 수많은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강행되고 있는 점은 청소년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기성세대의 권력 발휘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청소년 보호정책은 어른들의 판단에 근거한 유해매체로 부터의 격리가 아닌 청소년들의 삶 전반에 대한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유해” 한 것을 막고, 격리시켜 가두는 보호가 아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고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만이 진정한 청소년 정책으로서 가야할 길이다.

2011년 4월 29일의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은 곧, 청소년 주체들의 손에 의해 헙법재판소에서 다시 논의 될 것이다. 보호담론에 맞선 청소년들의 적극적 행보를 환영하며 그들의 손에 다시 쓰여질 청소년 정책을 기대해 본다.


2011.5.9

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