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성명


공동논평법원은 블랙리스트는 중대한 낙인이었다고 선고해야 했다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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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법원은 블랙리스트는 중대한 낙인이었다고 선고해야 했다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중 세종도서 선정 배제 사건에 대한 서울지법의 판결(`21.8.19.)에 대하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등과 함께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 인정을 환영하는 공동논평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예술계에서 이번 판결이 지니는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 추가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후속 논평을 발표한다.

 

먼저 우리는 판결문이 적시하고 있는, 출판진흥원이 세종도서 선정 사업에서 블랙리스트 출판사를 배제하기 위해서 추가하였던 선정제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국가와 사회 존립의 기본체제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도서,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도서, 일반적 시각에서 볼 때 사회 갈등을 조장할 소지가 있는 도서 등” (`14.7.23.)

 

‘도서 결격사유 점검 시 정치편향 도서는 선정되지 않도록 선정위원회에 비공식 의견 제출’ (`14. 10. 문체부 장관에 보고된 내용)

 

우리는 7년이 지난 지금도 블랙리스트 검증의 기준이었던 ‘심사’ 기준이 여전히 공공기관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을 판결 선고와 같은 날 발표된 ‘윤상원열사 전시 검열·작품 훼손 사건’ 공동조사단 보고서에서 확인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시 홍보물에서 ‘전두환을 찢’ 문구를 삭제한 것은 국가기관인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ACC) 홈페이지에 이러한 문구가 적힌 홍보물을 올리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법원은 출판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등재 및 배제 지시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 행위로 불법행위가 명백하다고 하면서도, 출판사들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되어 명예나 신용이 훼손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전 정부 시기 배제 지시는 비밀리에 진행되어 일반인이 알기 어려웠고 수사 내지 진상조사로 배제 지시 및 배제 사유가 드러난 것으로 사회적 평가가 저해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블랙리스트 낙인은 있었지만 낙인 효과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법원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 법원의 판결은 블랙리스트가 헌법상 표현의 자유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해로운 제한이었다는 헌법재판소의 위헌확인(`20.12.23.) 취지를 고려하더라도 파기되어야 마땅하다. 블랙리스트 낙인을 인정한다면, 낙인의 효과는 증명을 요구할 필요 없이 중대한 침해를 초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낙인은 낙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후에 알게 된다고 하여 그 충격이 덜한 것이 될 수 없다. 한 번 작성된 리스트는 영원히 폐기되지 않다가 언제 또다시 활용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법원의 판단은 안일하기 그지없는 선고가 아닐 수 없다. 법원은 블랙리스트 낙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자체가 심각한 명예훼손이라고 판단했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도 국가기관에서 은밀한 블랙리스트 낙인은 금지되지 않을 것이다.

 

법원과 피고 대한민국은 민사소송의 주장 입증책임이 피해자 측에 있다고 주장하며 출판사들의 위법한 배제 지시가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재산상 손해의 범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하고 있다. 2015년 세종도서 선정의 경우 법원은 출판사들에 대한 배제 지시와 세종도서 선정 종수 감소로 인한 손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있는 손해의 범위를 산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고 있다. 일견 타당한 듯 보이는 법원과 대한민국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피해자들이 피해의 정도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현실은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국가차원의 피해 조사와 회복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번 서울지법의 판결로 배제 지시와 지원 배제 결과 사이의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와 손해범위 조사, 피해 배상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후속조치 과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은 빌린 돈을 돌려달라거나, 교통사고에 대한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 조직적으로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회복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피해자들이 불가피하게 선택한 소송에 불과하다.

 

법원은 블랙리스트 등재는 그 자체로 출판사들과 작가들에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낙인이라고 선언하며, 정부에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단호한 판결을 내렸어야 한다. 정부도 법정에서 피해자들과 다툴 것이 아니라, 법원의 판결로 회복되지 못하는 블랙리스트 피해에 대하여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적극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이행해 나가야 했다. 정부가 이러한 이행책임을 방기하는 한 ‘윤상원열사 전시 검열·작품 훼손 사건’ 같은 ‘블랙리스트’ 사건은 계속하여 반복될 것이다.

 

2021. 8. 22.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